경주대학교 졸업. 개인전 17회
한국화가. 호는 청전(靑田). 충청남도 공주(公州) 출생
1915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 입학, 17년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였다.23년 노수현(盧壽鉉)과 2인전을 열었고, 29년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받았다.33년 청전화숙(靑田畵塾)을 설립하였고 36년 동아일보사 재직시 일장기말소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후 청전화숙에서 광복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썼다.전통적인 묵화기법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한국 산야와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를 사상풍으로 나타내는 화법을 썼다.4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창설되자 추천작가심사위원고문 등을 지냈으며, 50~61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예술원 공로상, 문화훈장, 31문화상,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다.대표작으로는 《창덕궁대조전벽화(昌德宮大造殿壁畵)》 《원각사벽화(圓覺寺壁畵)》 《산수도(1919)》 《초동도(初冬圖, 1926)》 《산가효색(山家曉色, 1960)》 등이 있다.
화가. 호는 운보(雲甫). 서울 출생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었으나, 모친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승동(勝洞)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뒤로 김은호(金殷鎬)의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그림을 익혔다. 1931년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선전(鮮展)에 처음 입선한 뒤,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으며, 제16회전에서는 《고담(古談)》으로 최고상, 17회전에서는 《하일(夏日)》로 조선총독상을 수상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46년 동료화가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과 결혼했다.광복 뒤에는 국전의 초대작가심사위원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수많은 해외전을 가졌다.2만 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그는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형태의 대담한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활달하고 힘찬 필치,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을 개척했다.대표작으로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군마도(1970)》 《웅(雄, 1970)》 《바보화조(1976)》 등이 있다.516민족상(1986)서울시문화상(1986)색동회상(1987)을 받았다.
조평휘 선생님은 1932년 황해도 연안 출신으로 동서 냉전의 패권 다툼이 한창인 시대에 미술 대학에서 수학하였습니다. 당시 미술계는 서구의 앵포르멜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동양화도 그 시대를 표상하기 위해 비(무)정형의 미술에 경도되었습니다. 이후 70년대 대학에 교편을 잡으면서 구체적 산수화로 변화되는 과도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자적 산수화의 세계를 완성하고자 매진하여 오셨습니다.호방한 필법의 기운 생동하는 운산의 작품은 흔히 대관적 산수화의 또 다른 개척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특히 구륵법에 의한 세부 묘사를 뛰어넘어 대담하게 운용하는 필법은 일필휘지에 모든 것이 표현되면서 자연의 미묘한 시간성까지 내포하는 의경의 산수화를 표현하고 계십니다.순수한 화선지와 필, 묵 등을 갖고 전통 산수화의 맥을 유지하면서 광대한 자연을 해석하는 작가의 세계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적이고 정적인 그림을 보여주었으며, 40년 무렵부터는 향토색이 짙은 농촌풍경을 소재로 경쾌한 필치를 구사하였다.또한 현대적인 감각의 화조화도 많이 그렸다.대표작으로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석란도(石蘭圖)》 《시골풍경》 《백두산천지》 등이 있다.
화가. 호는 춘전(春田)묵로(墨鷺). 서울 출생
1911년 서화미술원 제 1 기생으로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에게서 전통화법을 배웠고, 18년 서화협회 최연소 정회원이 되었다. 22년 제 1 회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하여 신예화가로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23년 이상범(李象範)변관식(卞寬植) 등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 전통적인 화법을 답습하는 데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회화정신을 탐구하는 의지를 보였다. 28년 선전에 출품한 《제 7 작품》 《무제》 등은 과감한 실험성을 도입한 진취적인 작품이었다. 30년대에는 환상적이고 정적인 그림을 보여주었으며, 40년 무렵부터는 향토색이 짙은 농촌풍경을 소재로 경쾌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또한 현대적인 감각의 화조화도 많이 그렸다. 대표작으로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석란도(石蘭圖)》 《시골풍경》 《백두산천지》 등이 있다.
서양화가. 평안북도 태천(泰川) 출생
1924년 평안북도 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2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45~6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대전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1949년 제 1 회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계속 출품하였고,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지냈으며, 58년 목우회 창립과 74년 한국신미술회 창립에 참가하였다.1960년 녹조소성훈장, 63년 대한민국문화포장을 받았다.<농촌화가>, <소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작품소재에 항상 소가 등장하며, 낮은 산을 배경으로 한 농촌풍경을 주로 다루었다.주요 작품으로 《목장(1969)》 《꽃피는 마을(1975)》 등이 있다.
1945 충남 홍성에서 출생, 홍익대와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수학, 한국예술, 문화단체 총연합회 대전광역시 지회장 역임
서화가(書畵家).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백운거사(白雲居士)취옹(醉翁)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본관은 남평(南平). 평안남도 중화(中和) 출생
8세 때 외숙인 소남(小南)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다.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10여 년간 진(秦)한(漢)당(唐)송(宋)의 서화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으며, 귀국 후 고종의 어명으로 왕세자 영친왕(英親王)의 스승이 되어 서화를 가르쳤다.한편,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와 어전사진사(御前寫眞師)가 되었으며, 1903년 한국 최초로 종로(鍾路)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기도 하였다.13년에는 화랑 <고금서화관>을 개설하였으며 15년에는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과 함께 <서화연구회>라는 3년 과정의 사설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였다.글씨는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의 서(書)에 있어서 모두 묘경(妙境)에 달하였고, 그림은 산수(山水)화조(花鳥)난죽(蘭竹)에 뛰어났으며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또한 대자(大字)를 잘 써서 전국의 궁전명승고적사찰정사누대마다 그의 필적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저서로 《서법진결(書法眞訣)》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 《육체필론(六體筆論)》 등이, 글씨로는 《법기보살(法起菩薩;內金剛)》 《금수강산(錦繡江山;平壤 浮碧樓)》 《보신각(普信閣;서울 鍾路)》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陜川 海印寺)》 《촉석루(矗石樓;晉州)》 등이, 그림으로는 《외금강만물상도(外金剛萬物相圖)》 《해금강총석정도(海金剛叢石亭圖)》 《대부귀길상도(大富貴吉祥圖)》 《천하기절(天下奇絶)》 등이 전한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 주요 저서 《백범일지(白凡逸志)》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서예가. 전라북도 출생
신위(申緯)를 사숙하였으며, 손바닥에 붓을 쥐고 쓰는 악필서예(握筆書藝)를 개발, 힘과 속도감 넘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오른손을 못쓰게 되자 왼손으로 쓰기 시작,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14회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1981년 동아일보 초대전, 88년 중앙일보 초대전과 현대미술초대전 등에 출품하였다.주요 작품에 화엄사(華嚴寺) 일주문과 불국사(佛國寺) 종각의 현판휘호가 있다.
1914년생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서울대교수, 박물관장
화가.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면소벽허자(碧虛子). 서울 출신
조석진(趙錫晉)안중식(安中植)의 문하생으로, 특히 안중식의 화풍을 이어받았다.1911년 서화미술회강습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18년 고희동(高羲東)이 서화협회를 조직하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21년 첫 서화협회전람회를 개최하였고, 《서화협회회보》에 <동양화의 연원> 등을 연재하기도 하였다.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23년 서화협회 부설 서화학원에서 동양화부 지도를 맡아 후진을 양성하였다.온건하고 자유로운 필력으로 산수인물화조절지(折枝)기명(器皿) 등에 능했고, 글씨는 예서행서에 뛰어났다.작품에 《추산도(秋山圖)》 《연화백로도(蓮花白鷺圖)》 《노안도(蘆雁圖)》 등이 있다.
영친왕비(英親王妃). 일본 도쿄[東京] 출생
황족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가쿠슈인[學習院]을 졸업하고, 20년 일본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과 결혼하였다.이 두 사람의 결합은 조선과 일본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계획된 정략결혼이었다.제 2 차세계대전 후, 47년에 제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왕족신분을 상실한 두 사람은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63년 한국적(韓國籍)을 취득하여 귀국하였다.73년 남편 이은과 사별한 후 한국에 남아 부군의 뜻을 이어 신체장애자를 위한 <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1913년 서울출생. 본관은 청주, 호는 규당(葵塘)
1927년 14세의 나이로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생이 되어 김은호의 화실 낙청헌(絡靑軒)에서 그림 지도를 받았다.일본 우에노[上野]미술학교를 나와 개인전을 열고, 1930년부터는 선전(鮮展)이라 불리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1939년 준특선을 수상하였다.광복 후 1958년 동양화가들의 친목단체인 백양회의 회장을 지냈다.이어 1977년에는 상림회전, 1983년에는 현대미술초대전 등에 출품하였다.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후소회 지도위원, 세종대학교 교수를 지냈다.